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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 2011년 05월 24일 17시 57분
디누 리파티가 마지막 공연이었던 브장송 실황녹음중 슈베르트의 즉흥곡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누 리파티는 거의 반평생을 백혈병과 싸우면서, 병때문에
퉁퉁불은 손가락을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명연주를 남기고 불과 33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저는 불행히도 디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있습니다만, 디누의
반의반의반도 세상에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디누이고자 하는 마음을 지키렵니다.

디누의 훌륭한 연주, 그리고 그 외 들려 드리고 싶은 여러 음악과 저의 짧은 사색을 여기에 올려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경고) 디누의 연주는 1950년대 이전의 녹음이라 녹음 상태가 매우 열악합니다. 하지만 그의 포스는 충분히 그 엉망인 녹음을 뚫고 전해옵니다. 때로 그의 연주는 가슴을 후벼파고 영혼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부득이 광고를 유치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음악 스트리밍을 하려다 보니, 음악파일 저장공간이 많이 들어, 이 블로그는 호스팅 공간을 최소 2기가 정도를 요구하며, 트래픽도 많이 필요해서 그 비용이 꽤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음악을 함께 듣고 나누기 위한 작은 불편으로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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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누, 문화, 예술, 음악,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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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gIcon dada 2008년 06월 04일 20시 17분
음악 너무 좋습니다.
이곳에 들르니,
제가 아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무척이나 하얀 분이시죠.^^
앞으로 자주 들릴께요..
좋은 음악 계속 부탁드립니다.
  2008년 06월 15일 23시 26분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008년 06월 18일 03시 06분
명반 중의 명반이죠.
앞으로도 좋은 음악들 기대합니다.
 침엽수지대 2008년 08월 19일 14시 50분
디누 리파티, 정말 잘 듣고 갑니다.
 BlogIcon 북스토리 2008년 08월 27일 01시 28분
클래식 너무 좋아합니다. 30대에 죽은 음악가가 많은데...
지네트 뉘베도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치는 분이었는데
비행기 사고로 30대 초반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천재는 오래 살지 못하나봐요. ㅠㅠ
좋은 블로그 사이트 잘 구경하고 갑니다.
 BlogIcon 디누리빠띠 2008년 09월 11일 18시 30분
아, 촛불 배너가 날아갔어요ㅠㅠ. 빠른 시일내 다시 복구하겠습니다. 절대 절대 제가 촛불을 끈것이 아닙니다.
 발가락 2008년 09월 25일 12시 27분
올려주시는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음악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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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하스킬의 특별한 연주 -슈만
클래식 이야기 | 2008년 12월 22일 12시 17분
슈만의 어린이 정경은 헤맑은 곡이다. 헤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곡이다. 여기에 있는 곡들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곡들이 없다. 물론 유명하기는 이 중 트로이메라이(꿈)가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첫번째 곡인 머나먼 나라에서를 가장 좋아한다. 그야말로 꿈의 세계를 향한 아이의 동경이 느껴지는 그런 곡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할 경우 그 느낌은 더욱 각별하다.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았던 연주자이기에, 그럼에도 그 고통을 물리치며 투명한 경지에 도달한 거장의 연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스킬이 연주하는 이 곡은 동경이 아니라 동경 저편에서부터 울리면서, 도리어 우리를 동경에 빠뜨린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았던 피아니스트인 클리포드 커즌의 연주와 고통속에 살았던 하스킬의 연주를 비교해 보면 두 거장이 같은 곡을 얼마나 다르게 연주하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커즌의 연주


다음은 하스킬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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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어린이의정경, 어린이정경, 예술, 음악, 클라라하스킬, 클래식, 하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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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25일 1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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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신성함에 대하여(1)
클래식 이야기 | 2008년 11월 15일 17시 41분

  “학문과 예술만이 인간을 신성하게 한다.”

이 폼나는 경구는 베토벤이 평생 주문처럼 읊고 다녔던 말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 활동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신성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충실한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라조모스키 공작과 말다툼을 한 끝에 “당신은 그저 공작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이 남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라는 선언을 하기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선언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라조모스키 공작은 베토벤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그 이름조차 남지 못했을 테니까. 하긴 베토벤의 우상이었던 모차르트는 그 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스물넷에 이미 그렇게 말했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규직 일자리를 박차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베토벤이 음악에 대해 느끼고 있던 신성함과 외경은 참으로 지고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우상인 모차르트 역시 이 신성함의 척도를 이용해서 평가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그 장엄하고 신비롭고 숭고한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 들었으며, 반면, 모차르트가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세속적인 내용인 ‘돈 지오바니’나 ‘코지 판 투테’ 같은 이야기를 오페라로 작곡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토록 신성한 재능을 이토록 하찮은 이야기에 쏟아 붓다니...” 라고 말하면서 그는 모차르트의 돈지오바니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또 베토벤은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의 공통된 주제들을 보면 베토벤이 빠져들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헨델이 즐겨 다루었던 이야기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위대한 인간성과 숭고한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장엄한 승리를 쟁취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것이 베토벤을 깊이 감동시키고 자극해서 유명한 9번 교향곡(합창)에 영감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베토벤은 9번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 헨델의 ‘메시아’에 거의 열광하고 있었다. 어찌나 열광했던지 헨델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나 같이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위대한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수 밖에 없는데, 나는 베토벤 보다 한참 하찮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헨델 작품의 악보와 음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범죄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만 모골이 송연해 지기까지 한다.

어쨌든 평생 교회에는 거의 머리도 들이 대지 않았던, 범신론 내지는 이신론자임에 분명했을 베토벤에게 음악은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대상이었고, 그는 평생을 그 신성함을 파내기 위해 분투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의 신성함은 바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바흐에게는 오직 교회와 신만이 신성했다. 음악은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심부름꾼의 역할만 해야 했으며, 바흐 자신도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라거나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한 사람의 기술자일 뿐이며, 그 기술은 교회를 위해 쓰이는 여러 다양한 분야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다. 음악이 신성한 이유는 그것이 음악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은 훌륭한 음악가이며, 따라서 인간들 중에서 질적으로 다른 고결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 자체만의 신성함을 최고의 경지로 올리고 싶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최고의 경지라고 여겼던 9번 교향곡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를 사용함으로써 음악 자체의 위대함이라는 목표를 이그러뜨리고 말았지만, 9번 교향곡 이후 작곡한, 그리하여 죽기 직전까지 작곡하고 있었던 현악4중주들에서는 거의 그 목표에 도달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음악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신성함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베토벤의 노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그의 마지막 현악4중주들을 통해 눈물겹게 읽을 수 있다.

베토벤의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과 광신도적 태도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사회의 변화 발전의 덕분이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베토벤 이후 음악의 지위가 점점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인간을 현 존재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새로운 존재로 진화시키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까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거의 가망이 없는 고통으로만 가득한 이 추악한 세계에서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통로로서 음악을 제시하기까지 한 것이다. 실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아무리 곱게 봐주려고 해도 불교사상을 그대로 도용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불교를 도용하지 않은 그 자신의 유일한 독창적 사상은 결국 음악이다. 고통의 피난처, 안식처로서의 음악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세계관을 거의 왕자병(!)에 가까운 자기 긍정의 힘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니체에게 음악은 단지 피난처나 도피의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니체에게 음악은 미천하고 나약한 인간이 한 차원 높은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관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초인이라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현실화 할 수 있는 음악적 단초로 금관악기를 마구 난사하고 있는 바그너 풍의 음악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그너는 ‘탄호이저’나 ‘파르지파르’와 같은 크리스트교 색체가 짙은 음악을 만듦으로써 교회와 야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성경을 읽을때는 손이 더러워질까봐 장갑을 끼고 보는 니체 앞에서 교회에 굴복한 옛 친구라니!

 

이렇게 음악의 지위는 현기증 날 정도로 상승하였다. 음악을 기껏해야 이데아에 대한 가장 저급한 형태의 그림자, 복사본의 복사본 정도로 보거나 아니면 아예 자기를 상실한 일종의 정신병으로 바라보았던 플라톤이나, 음악을 심리, 감정 현상에 대한 아주 저급한 모방으로 간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교해 보면 이건 거의 천지개벽이라고 할만 한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지혜로운 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또 주역(周易)에서도 한 결 같이 달이 차면 기운다는 식의 경고문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모습만 바꾸어서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 동양만의 전유물이랴? 고대 아테네의 7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솔론도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당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에게 지혜로운 말씀을 남겼는데, 이 글의 주제와는 많이 벗어나지만, 매우 훌륭한 말씀이기 때문에 잠시 여기에 옮겨본다.

“왕이시여! 저는 신이 인간의 번영을 질투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을 70년이라 하면 2만 6250일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루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왕이시여, 인간의 생애는 이토록 우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시여! 왕께서 훌륭한 생애를 마치고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지금 아무리 왕께서 부유하고 나라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절대 왕을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볼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한다. 어렵고 추상적인 용어 대신 2만 6250일이라는 숫자를 도입하여 1/26250이라는 극히 미세한 확률을 제시함으로써 인생의 무상(無常)을 일깨운 이 재치에 무릎을 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1/수십억 겁 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쓰지 않아도 1/26250이면 충분히 무상함을 느낄 만큼의 미세한 확률이며 또한 이 숫자는 실제 인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한 숫자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무상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양인들의 지적인 유산을 평가절하 하는 우매함은 범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공자니 맹자니 묵자니 노자니 장자니 석가모니니 예수니 할 것 없이 동양에서 탄생한 사상들은, 그래서 많은 동양 국수주의자들을 흥분시키는 그런 고대 사상들은 사실 동양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동양인들은 그것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개념을 사용해서 기술했고, 서양인들은 그것을 아주 간략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동양의 고전이 훨씬 더 깊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그 깊이라는 것이 개념화 부족의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동양의 최고 철학책은 역시 대화체로 구성되어 그래도 이해하기가 편한 논어(論語)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다만 이 대화들이 계통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바람에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티카’ 등에 비교한다면 그 격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도대체 모호함을 아무리 깊이로 위장한다 한들 그것은 철학자의 올바른 자세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난데 없이 머리와 복장은 불교풍으로 꾸미고서 ‘21세와 노자’ 어쩌고 하면서 무덤 속에 있던 동양의 고대 사상가들을 벌떡 일으켜서 마구 침소봉대하며 마치 2000년 전의 사상이 오늘날을 예언해서 맞아 떨어졌다는 듯이 사기치는 일은 더더욱 그릇된 자세일 것이다. 아니 그것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 대부분 동양의 고전들은 체계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부터 부자유스러운 존재론적인 멍에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노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설익은 사상을 비판으로부터 막아 보자는 얄팍한 술수에 다름이 아니다.

아직 할 말은 산더미 같이 남았지만 동서양의 비교는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까.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에 대한 홀대는 물론 부당한 것이지만 음악을 지나치게 신성화 하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이기는 하지만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마’, 바그너의 ‘파르지팔’ 처럼 의도적으로 신성함을 목표로 해서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신성하게 여기라고 강요하는 그런 신성 과잉의 음악은 때로는 오히려 내게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에서도 신성과잉의 징조가 보이는 ‘메시아’ 보다는 인간의 모습(특히 작곡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젭타’ 나 ‘마카베우스의 유다’를 더 선호한다. 그 중 ‘젭타’는 정말 위대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성 과잉이 되었건 말았건 간에 사람이 음악을 들으며 어떤 신성함 혹은 신성함과 비슷한 일종의 탈 현세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만은 부동의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눈을 지그시 감고 마치 참선이나 수도하는 듯한 자세로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며, 이른바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음악가에게 구도자라는 칭호를 왕왕 붙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일 보다도 특히 음악을 들으며 넋 나가는 모습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학적 조사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쉽게 매니아층이 형성되는 분야가 음악이라는 것도 확실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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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세이 -테초에 소리가 있었다(3)
클래식 이야기 | 2008년 10월 29일 19시 29분


 어찌어찌 하다보니 쉽게 쓰겠다던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훨씬 잘난척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 결국 말 하고자 하는 요지는 음악의 역사는 날이 갈수록 폴라톤적인 요소와 피타고라스적인 요소가 화학적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감상자는 플라톤이되고, 제작자는 피타고라스가 되고 만 것이다. 즉 음악듣기를 좋아하는 것과 음악 만들기는 별로 상관이 없는 심지어는 적대적인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음악의 존재론적인 모순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적인 코레이아, 이른바 넋 나간 열광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인간은 음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완전한 이성적 존재였다면 유희라는 것이 필요 없었을 테니. 그러나, 음악이 디지털화(수학화)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음악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음악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마침 주변에 즐거운 소리 잘 내는 친구가 있으면 다행이고, 없다면 하는 수 없이 스스로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던, 활줄을 튕기든 하면서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야 했을 테니까. 마치 우리나라의 다듬이돌 합주처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모순인가? 우리가 음악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모순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사람들이다. (베토벤의 고뇌는 무엇을 말하는가? 열광을 따르자니 수학이 울고 수학을 따르자니 열광이 우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베토벤의 슬픔”이라는 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애초에 음악적 열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지 뛰어난 수학자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과학적으로 곡을 만드는 법을 착실히 익혀서 그 뛰어난 기술로 곡을 만든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음악은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같은 것이다. 실제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만 키보드로 요란하게 두드린 다음 주문한 사람에게 이메일로 전송하는 음악가도 있다. 이미 음악도 하나의 사업인 것이다. 흔히 팝음악이나 영화음악을 상상하겠지만, 실제로 이른바 클래식 음악계라는 곳에서도 이런 현상은 심각하다. 작곡과에서는 음악을 만듦에 있어 필요한 감각과 정서를 키우지 않고, 그런 훈련도 하지 않는다. 그저 디지털화된 악보의 수학적 분석만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예술가가 아니라 작곡 엔지니어의 양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음대 작곡과 졸업생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일 보다 남의 악보에 분석식 써 놓는 일을 더 좋아한다.

또한 그 분석식을 적음에 있어서도 대체로 대학 작곡과 출신들을 보면 19세기 이전의 작곡가로는 바하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그 이후의 작곡가로는 라벨이나 스트라빈스키, 혹은 안톤 베베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수학적이니까. 일반인이 들을 때는 따분하거나, 혹은 듣기 거북한 소리이지만 자신들이 바라보는 악보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우주의 심포니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그런 조화로운 세계가 펼쳐지니까. 소리로는? 그것은 알 바 없다. 피타고라스의 법칙이나,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창 공부하고 있는 수학도가 직각삼각형 그림을 보면 단지 썰렁한 도형으로만 보이는가? 마찬가지로 온갖 음악의 수학으로 머리를 무장했는데, 아무리 따분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소리라 한들 그렇게 들리겠는가?

그런데, 대중들은 전문가를 동경한다. 음악을 감상하는 자들이 음악을 만드는 자들에게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당연히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음악의 원초적 열광은 어디로 갔는가? 클래식 뿐 아니라 록 음악까지 그렇게 들으려고 한다. 영국의 댄스음악인 테크노를 심각한 표정으로 깊이 감상하는 한국대학생은 흔한 풍경이다.

당연히 내겐 이런 현상이 반갑지 않다. 음악이 소리를 주물럭거려서 만든 공산품이 아니라면, 분명히 그 주가 되는 것은 플라톤적인 열광(코레이아)이며, 피타고라스적인 요소는 단지 그것을 용이하게 하고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음악계는 주객이 전도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일기 시작한 바하에 대한 외경의 움직임, 그리고, 그 거룩한 아름다움의 표상이었던 모차르트가 1990년대 이른바 모차르트 재조명 작업(그의 서거 200주년을 맞아 이루어진 집중적인 연구)을 통하여 신산(神算)이라 불릴만한 계산의 대가로 그 이미지가 엄청나게 변모되어 가는 과정 등이.

불과 10년 전만 해도 모차르트의 41번 교향곡을 말할 때 “태양과 같은 광채에 휩싸여 있고, 범접하기 힘든 장엄한 위엄에 가득 찬 제왕과 같은 기품....”운운 하는 것이 주조를 이루었었는데, 최근 5년 전 부터는 “모차르트가 아니고서는 누가 감히 무려 6개나되는 모티브를 푸가로 엮을 시도를 하였겠는가? 기껏 1주제, 2주제에 발전부 주제까지 쳐서 2-3개의 주제만을 사용하고도 쓰기 어려운 소나타 형식을 무려 5개나되는 주제를 가지고 엮어내는 절묘한 테크닉...”운운하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음악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이긴 하지만, 모차르트의 41번 교향곡을 주제가 5개라서 즐겨듣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곡을 즐겨 듣던 사람들 중에 모티브를 일일이 따져가며 그 수를 세어가며 왼쪽 뇌를 맹렬히 혹사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딴 얘기는 악보 상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5개나 되는 주제를 사용해서 엮어낸 소리, 그 소리 자체인 것이지, 주제의 개수와 그것을 엮는 테크닉이 아닌 것이다.

베토벤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계기로 활발히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 “열정의 작곡가”는 “오묘한 기법과 지극히 까다로운 기법의 작곡가”로 변신되었다. 최근 나타나는 베토벤과 관계되는 글은 거의 대부분 아주 단순한 동기를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가는 이른바 “아주 평범한 벽돌들을 쌓아서 굉장한 건축물로 만드는” 그의 수학적 능력에 집중되어있다.

아! 이제 음악은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그 존재론적인 모순으로 인하여 기껏해야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 아니면, 소수의 지배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암호체계로 변해가고 있다. 음악을 듣는 자는 아직도 플라톤적인 열광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음악을 만드는 자는 더 이상 열광에 의지하지 않는다. 음악은 수학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수학 같은 음악에서 열광을 느낄 수 없다고 불평하는 청중들에게 그것은 너희들의 무식 탓이라고 우긴다. 이제 청중들도 수학을 공부한다. 그럼 작곡가는 더 어려운 수학을 만든다. 그리고 또 청중들을 꾸짖는다. 때로는 청중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펑크록 같은. 그러나, 그 반란은 이내 진압된다. 펑크는 쉬운, 그러나 열광적인 음악의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U2를 통하여 록음악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전문가는 곡을 만들겠지만, 듣는 자는 다른 곳에서 열광을 구한다. 음악이 아닌 스타의 표상에서, 아니면 과거의 음악에서. 그렇게 음악은 사라져 간다.

실제로, 오늘날 음악의 영향력은 형편없이 약해져 가고 있다.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영은 거의 고사상태이다. 오늘날 더 이상 모차르트 같은 인기 클래식 작곡가는 없다. 죽은지 200년이 지난 사람의 음악이 아직도 가장 많은 발매 부수를 자랑한다는, 그래서 오늘날 살아있다면 저작권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이라는 그 위대한 생명력을 찬양하기 보다, 그럼 도대체 오늘날 작곡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200년 전의 음악보다도 관심을 끌지 못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클래식 뿐만이 아니다. 소위 대중음악의 분야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늘날 왕년의 비틀즈나 롤링스톤즈 같은, 아니 하다못해 레드제플린이나 딥퍼플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소위 대중 음악가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대중음악에서도 진지한(!)음악을 한다는 사람들과 풀빵 음악이 분화 되어버렸기 때문이고, 그 진지한(!)그룹은 악기만 전기기타 등등일 뿐이지 알아먹기 힘든 어려운 음악으로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는 오늘날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평론가가 생기고, 그 평론을 또다시 논쟁거리로 만드는 학자가 생기면서, 이젠 더 이상 록도 왕년에 보여주었던 플라톤적인 열광의 힘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풀빵 음악이 뭐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른바 스타 시스템의 현대판 집단매춘(결국 모든 스타 시스템은 성 상품화다)이나, 영화 사운드트랙의 형태로 기생할 뿐이다. (벌거벗은 모습에 기생하던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는 이제, 그녀의 나이가 들고 성상품화가 힘들어지자 영화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이른바 영계에 대한 남자들의 성욕을 노골적으로 상품화하는 풀빵 음악이 만들어진다. 한국의 S.E.S 나 미국의 Jewl이나 마찬가지다. 99년 트렌드의 특징. 미소녀 밴드. 본인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구자가 된 앨라니스 모리셋. 그녀의 성공이 풀빵 장수들에게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주었으니까.)

이건 음악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걸작이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 보다 대중적으로 더 유명하다고는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렘브란트는 몰라도 피카소는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그라피나 만화를 보지만, 그래도 이른바 순수미술의 영향력은 아직은 상당하다. 예술 중 가장 빨리 죽어 가는 음악. 이제 나는 여기에 음악을 위한 묘비명을 새기려고 한다. 내가 사랑했던 음악들에 대한 비망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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