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음악을 사랑하고 생각을 즐거워 하는 아이들을 기르고 싶은 교육자의 소박한 공간입니다 |
 |



«
2009년 11월
»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 8 |
9 |
10 |
11 |
12 |
13 |
14 |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29 |
30 |
|
|
|
|
|
|

| 흑인음악, 니체, 문화, 실천철학, 교회, 스코세지, 윤리, 천재, 지네트느뵈, 파괴비평, 아리스토텔레스, 쥐잡자, 무신론, 노동계급가수, 카톨릭, 저항가요, 목적론, 음악발생학, 바이올린, 근대성, 삼매지경, 가치의전복, 도덕형이상학정초, 예술학, 소니, 영적인음악, 행복론, 록, 레이코프, 아뉴스데이, 마르크스, 디누리파티, 라틴, 고통과예술, 도피, 명언록, 쇼팽, 실존주의, 설득, 탈신화화, 촛불, 권력, 분덜리히, 프래그머티즘, 미학, 컴퓨터가연주한바흐, 두대의피아노, 락커, 보수, 하라, |

TOTAL 39407
YESTERDAY 70 TODAY 63 |
|

|
 |
 |
|
 |
 |
굴드 음반의 복제, 그리고 구제 미학 |
| 클래식 이야기 | 2008년 10월 07일 18시 05분 |
|
 영어만 쓰면, 웬지 근사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자기 본령인 영화에 대해서는 별 깊이도 없는 어느 얼치기 평론가가 마구 외국 이론가 이름을 들이대다가 저지른 코메디가 "그러니까, 월터 벤자민에 따르자면...", 물론 그의 영어 코메디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이클 푸콜트, 개스턴 배이츨러 에서 압권을 이루었다. 아, 여기서 하려는 주제는 이게 아니고, 문득 그 웃기는 평론가의 기억이 되살려 놓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다.
최근에 최성민씨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벤야민의 사방으로 반짝이는 사유의 편린들이 연거푸 번역이 되고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역사철학 테제, 폭력에 대하여 등은 물론 저 엄청난 페이지의 "아케이드 (파사쥬)프로젝트"까지 완역 된 마당에 이제 벤야민의 중요한 글은 다 옮겨졌다고 볼수 있다.
아래 포스팅에서 글렌 굴드의 바흐 연주를 컴퓨터로 재현한 음반에 대한 각종 논란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이름이기도 하다. 클래식 연주자는 20세기 이후 예술가들 중 거의 마지막 신화적 존재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그너에서 이미 조짐이 보엿지만, 20세기 들어 작곡이라는 과업은 이미 고도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나름의 학적 체계와 기술, 그리고 정교한 계산의 영역이 되어버렸지만, 그리하여 작곡가의 작품은 단지 오선지의 부호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 천재적인 연주자들의 휘황찬란한 영감에 가득찬 연주의 순간이야 말로 진정 신화가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천재의 칭송을 받는 존재가 작곡가에게서 연주자로 넘어간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웬지 체계적 훈련과 거리가 멀고 오직 신적 영감의 내림굿이라도 받은듯한 지휘자에게로 넘어간 것도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작곡가의 아우라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리라. 체계적인 화성학과 대위법은 작곡을 기술의 영역으로 밀어넣어, 아우라를 제거하고 합리화(!)했다.
그런데 웬걸? 레코드가 등장했다. 대량복제의 시대가 된 것이다. 콘서트 홀이라는 신전에서 경건하게 영접했던 저 피아노의 신, 바이올린의 신이 내집 안방, 거실, 심지어 워크맨의 탄생 이후 어디에서나 만날수 있게 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콘서트 홀에서조차 수십년 전에 죽은 연주자의 연주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연주자의 아우라도 사라져가고 있다. 아니, 이미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아우라는 어디까지나 접근 불가능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의 주인장인 디누 리파티 역시 열악한 음질의 음반 몇장만 남겨놓았기에 아우라가 형성된 것이다. 만약 그의 연주스타일을 그대로 복제해서 피아노에 입력해서 재생시킨다면 그 아우라도 사라질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런 탈신화의 현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벤야민은 또 다른 측면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다. 탈신화화된 대상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현재의 실천과 연관되면서 재구성되고 재의미화된다. 파괴된 신화는 새로운 의미의 구성이다. 신화는 파괴되지만 동시에 지배계급의 특권 운운하는 또 다른 낙인도 함께 파괴된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악마성이라는 모호한 신화로 포장된 보들레르를 파괴하고,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적 퇴폐라는 다른 낙인도 그에게서 제거할수 있게 되엇다. 이로써 보들레르는 현재의 시간속에 재구성된다. 이를 파괴와 구제로서의 비평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컴퓨터로 굴드를 복제하려는 시도 역시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소니는 굴드를 복제함으로써 돈을 벌려 하겟지만, 복제가 성공할수록 굴드의 신화는 무너지며, 소니는 자신의 상업적 동기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우리는 굴드의 신화가 아니라 굴드의 실체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며, 어떤 아우라 없이 굴드의 연주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파괴는 곧 구제인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글렌 굴드 자신이 콘서트 홀의 카리스마 운운하며 피아니스트가 신화화 되는 것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굴드는 죽은 뒤 자신이 신화화 된 것을 슬퍼했을 것이며, 자신의 신화를 이용하여 장사하려는 소니에게 분노했을 것이지만, 그 결과 자신의 신화가 깨어지는 것을 반길지도 모른다. 굴드의 평소 소신대로라면 "당신의 연주의 신비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에 "단지 피아노를 치는 것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 트랙백0 | 댓글0 |
 |
구제미학,
구제비평,
굴드,
글렌굴드,
미학,
벤야민,
소니,
아우라,
아우라의파괴,
예술,
예술론,
탈신화화,
파괴비평,
합리화 |
|
|
 |
|
|
 |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59 |
|
|
|
|
 |
|
 |
|
|
 |
 |
|
 |

|
 |

'>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