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사색이 있는 공간 방명록  |  위치로그  |  태그  

음악을 사랑하고 생각을 즐거워 하는 아이들을 기르고 싶은 교육자의 소박한 공간입니다


전체 (60)
모차르트 (6)
클래식 이야기 (21)
오페라이야기 (2)
록 이야기 (11)
철학 한 토막 (14)
내가 읽은 책들 (3)

«   2009년 11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바이올린피아노2중주문화욕망과이성음악사회학굴드명언록벤야민도덕법칙영화shine a light확신보수세네카종교적경험로커마적공리주의아이들피아노연주저항음악설득구제비평모차르트피아노협주곡종교적경험의다양성쇼팽모차르트의초월성투쟁가컴퓨터연주바이올린윤리학도피코지판투테부정변증법자유청중매너예술철학종교칸트윤리학교섭클라라하스킬이성소울미하일플레트뇨프빅토르하라진보롤링스톤스블랙북흑인음악

TOTAL 40411
YESTERDAY 53    TODAY 85

RSS
철학 한 토막 에 해당하는 글 14 개
2008년 10월 13일   용기에 대하여(아리스토텔레스) (2)
2008년 10월 01일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1) 세네카의 경우
2008년 09월 18일   음악에세이 1 -음악과 음악감상 (1)
2008년 09월 14일   사르트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에서 한토막
2008년 09월 10일   니체 "안티 크리스트"에서 한 토막
2008년 09월 09일   에피쿠로스의 편지들 중 일부
2008년 09월 07일   결국 도덕이란 자유의지가 법칙에 따라 행하는 것?(칸트의 윤리형이상학정초에서)
2008년 09월 01일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에서 한 토막
2008년 08월 27일   근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는 동의어다.
2008년 08월 26일   철학의 도피
2008년 08월 25일   기독교에 대하여
2008년 08월 19일   진보가 우파를 비판할 때
2008년 07월 04일   촛불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
2008년 07월 03일   사회를 이끄는 이는 반대와 혼란을 용납할줄 알아야 한다


용기에 대하여(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한 토막 | 2008년 10월 13일 09시 38분

용기란 두려움과 태연함의 중용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물론이고, 또 무서워하는 것들은 온갖 악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불명예, 빈곤, 질병, 친구가 없는 것, 죽음 등을 포함한 모든 악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할 만한 것만을 두려워 한다. 예를 들어 불명예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고귀한 일이고, 반대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천한 일이다.

  ...빈곤이나 질병처럼 악덕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자기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용감한 사람과 관계 있는 무서운 일은 무엇인가?

  용감한 사람은 사람가운데서 가장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움에 부딪혀도 떳떳하고 순리에 따라 명예롭게 행동한다. 이것이야 말로 용기의 목적이다.

  모든 활동의 목적은 그 활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용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용기는 고귀하기 때문에 그 목적도 고귀하다. 용감한 사람이 무서운 것을 참고 견디며 용기있는 행위를 하는 것은 고귀한 목적 때문이다.

  한편, 정말 무서운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태연한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며, 허풍선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용감한 척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용감한 사람은 무서운 일에 대해서 정말 용감하지만, 무모한 사람은 용감한 것처럼 보이려고 용감한 사람을 최대한 흉내 낼 뿐이다. 그래서 대개 무모함과 비겁함이 섞여 있다. 그들은 그들은 가능한 한 태연해보이려고 하지만, 정말 무서운 일은 견디지 못한다.

무서워하는 일에서 또 다른 방향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사람은 겁쟁이다. ...이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겁쟁이는 비관적인데, 모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용기란 두려움과 태연함의 중용이다. 어떤 일을 선택하거나 견디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한 일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비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 사랑, 그 밖에 무엇이든지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하여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고, 오히려 겁쟁이가 하는 행동이다. 골치 아픈 일을 피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마음이 약한 탓이고, 이런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2
명언, 아리스토텔레스, 용기, 윤리, 윤리학, 중용, 철학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61


 김태경 2008년 10월 21일 00시 44분
용기란 두려움과 태연함의 중용이다....달리말해
용기란 태연함을 두려워하는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주인장 2008년 10월 21일 10시 49분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려운게 마땅한 상황이나 상대 앞에 태연한 것도 문제고, 전혀 두려울게 없는 아무한테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문제죠. 용기란 두렵지만 그것과 맞서는 것일겁니다.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1) 세네카의 경우
철학 한 토막 | 2008년 10월 01일 10시 29분

요즘 자꾸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글을 찾아 보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점점 행복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에 불행해진다.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 세네카는 이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디 들어보자......


행복해지고 싶다 -이 말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말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천 명에 한 사람도 어디에서 행복이 오는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 우주는 암중모색하듯 무작정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둘러 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갈수록 당초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둘째 “어느 길로 가면 가장 빠른가”를 살펴야 한다.

바른 길을 가면 우리는 하루하루 나아지지만 반대로 곁길로 접어들면, 즉 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면, 곧 미궁에 빠져 언제까지나 방황과 착오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능한 길잡이를 갖는 것이다.

보통 여행의 길이라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바른길을 가르쳐 줄 수도 있고, 또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대체로 정해져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에의 길은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밟고 간 발자취가 위태롭기 짝이 없으며,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르쳐주기는커녕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헤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들이 떼를 지어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보다는 이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패배의 연속으로,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넘어지고 그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또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러한 잘못은 곧 “군중이 진리와 정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군중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행복한 생활은 결코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관습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맹신하기 쉬우며 결코 좋고 나쁜 것을 검토해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군중은 반드시 비속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위층도 포함하는 말이다. 나는 군중이라는 말을 눈에 보이는 외관이 아니라 사물을 올바로 판단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사용하고 있다.

세속의 영달은 사람의 머리를 혼미하게 하여 한동안은 관심을 끌지만, 누구나 조용히 마음속으로 자문해 보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만 골라서 했다”고 말하거나 “간구한 것 보다 오히려 두려워 멀리한 편이 훨씬 더 나은 일이었다”고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번뇌를 벗어나 신과 인간에 대한 우리 의무를 깨닫는데 있다. 장래의 일은 전혀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즐길 일이다. 즉 희망이나 걱정에 사로잡혀 기뻐하거나 두려워할 것 없이 현재 자기가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축복은 우리 가운데, 즉 눈이 닿는 범위 내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눈을 감고 어둠 속을 헤매다가 보기 흉하게 넘어져 뒹굴고 있는 것이다. 행복 자체에 넘어져 뒹굴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열심히 찾고있는 행복인줄 모르고 있다.

정밀은 마음의 평형된 상태로서 행운과 불운에 의해 흥분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일도 없다면 이러한 평형은 인간 완성의 상태이므로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고 인간의 능력이 최고 정점에 도달하여 각자 자기 스스로 설 수 있게 된 상태다. 자기 이외의 것으로 자기를 뒷받침하면 넘어지는 수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지하면 넘어지지 않는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지하는 사람은 완전한 평안을 즐길수 있고 삼라만산을 올바로 관망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질서와 절도가 있어 예의바르고 그 본성에 자애가 넘치면 이지에 의해 삶을 바르게 꾸려나간다.

확고불변한 판단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뜬구름에 지나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 시종일관하는 것 역시 옳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영과 두려움으로 미혹하는 바를 극복했을 때에는 반드시 가슴에 자유와 평안이 깃들기 마련이며, 이때야말로 저 물거품 같은 향락에의 욕구(최선의 방법으로 즐겨봤자 결국 공허하고 유해하다) 대신에 영원한 평온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합당한 즐거움을 올바르게 즐기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바랄수 있는 사교적인 우아한 취향에 대해서까지 트집잡을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언제나 즐겁고 -물론 이 즐거움은 본인의 영혼 속에서 생기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것이라야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명언, 부동심, 세네카, 스토아, 실천철학, 윤리학, 철학, 행복, 행복론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57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음악에세이 1 -음악과 음악감상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18일 22시 08분

음악과 음악감상

우리 나라에서 취미에 대한 설문 조사라도 할라치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음악감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취미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 하면 음악 연주, 혹은 음악 비평이나 음악 작곡이 취미로 등장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엄청나게 광범위한 음악 소비계층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적어도 음악 생산자와 음악 소비자의 비율을 보면 그렇다. 턱 없이 부족한 음악 공그자와 무지막지하게 많은 음악 소비자의 비율.

그렇다면 이명박이 그토록 숭상하는 시장경제의 법칙에 따라 -그런데 주제에 벗어나는 말이지만 시장경제는 그 출발점부터 모순이다. 일견 가장 정확해 보이는 수요공급곡선이라는 대전제부터가 틀렸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에게 따로 문의하기 바란다.- 우리 나라의 음악 공급자는 엄청난 독과점이윤을 누려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취미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한국어의 원초적 어휘 빈곤 때문에 할 수 없이 영어를 병용해서 표현한다면, 아니 김대중이랑 신낙균이 좋아하게 한자까지 같이 병용 한다면 한국인은 취미(趣味 Hobby), 취향(趣向 Taste), 관심사(關心事 Interest )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이것들을 그 중독성에 따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취미>관심사>취향의 순서가 된다.따라서 “나의 취미는 음악감상이다.”라는 문장과 “나는 음악감상에 관심이 있다.”라는 문장은 그 의미가 다르며 더더군다나 “나는 음악 쪽에 취향이 있다.”라는 말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약간 관심이 있거나 그쪽으로 좀 구미가 당기는 정도를 모조리 취미라고 해버리는데, 그것은 비약도 엄청난 비약인 셈이다.

적어도 취미라고 할 수 있으려면, 노동하는, 즉 생존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벌어 들이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이, 심지어는 노동의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투자되는 생산 외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레져의 시대를 맞이해서 취미와 노동시간의 비율이 상류층과 하층민을 나누는 중요한 잣대(엥겔 지수를 밀어내고)가 되고 있는 마당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음악감상이 취미인 사람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 수는 얼마나 되는가? 바로 여기에 통계상의 거품이 드러나는 것이다.

자. 갑자기 뜬금 없이 왜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나의 가장 강력한 취미는 음악감상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고, 그때 그 취미로서의 음악감상이 흔히 달리 적을 것이 없을때 취미로 적어 넣는 음악감상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나의 음악감상은 손으로 획득하는 음악기술을 성공적으로 획득하지 못한 나의 한을 온통 귀에다가 쏟아 부은 한풀이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예민하고 고급스러운(?) 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음악을 전공하는 것과 고급의 귀를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명 가수가 명 프로듀서나 명 기획자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또 반대로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나 연주하는 사람이 뜻밖에도 다른 사람의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의 음악을 쉽게 오해하는 경향을 보이는 일도 왕왕 있다.비단 음악뿐이 아니다. 위대한 영화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천재감독 팀 버튼이 정작 영화 감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팀 버튼은 심지어 자신은 영화를 보는 눈이 형편없다고 스스로 떠벌리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에드 우드’ 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형편없는 영화 보는 안목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공개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기인은 기인이다.

어디 그 뿐일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이 사람의 작품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경우는 평생토록 독일의 한 제후국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고, 당시 유럽의 다양한 음악을 거의 들어보지 못한 편벽된 귀를 가지고 있었다.물론 음악을 듣는 안목도 썩 신통치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접한 음악은 공연이 아닌 단지 악보인 경우가 많았다. 하긴 바하는 뛰어난 수학자지 음악가는 아니니까

만약 필자가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역시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처럼 남의 글을 읽지 않는 인간도 드물테니까. 특히 문학작품은 거의 읽지 않아서 돈 주고 사 본 시집은 이백 시선과 굴원의 초사 두권, 만약 시경을 시집으로 넣어 준다면 세권 뿐이었고, 그 외에 읽어본 시라고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 오페라 대사, 그리고 케케묵은 역사책에 실린 한시들 정도였다. 아참! 앞서 소개한 시집들 외에 돈 주고 산 시집이 세 권이 더 있다. 하나는 중학교 때 용돈을 모아서 산, 화려하게 그림으로 치장된 워즈워드의 시집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교 때 산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Ausgewaehlte deutche Lyriken'이라고 하는 독일 시인 선집이다. 어쨌든 나의 시 쓰는 능력과 시 읽는 능력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나의 음악을 듣는 능력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곡하는 능력과는 무관하게 발달되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가능하다.

어쨌거나 나는 오랜 방황 끝에 나의 진정한 재능이 손 보다는  귀와 주둥아리에 있다는 것을 차차 깨달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그 마의 80년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음악 미학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길. 그렇다고 내가 80년대 때 좌익 폭력학생이었던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니까. 난 지금도 정치적으로는 좌파이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1)좌익 폭력학생, (2)회색분자, (3)우익, (4)정치에는 무관심하며 나에게만 충실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1)번을 다시 고를 테니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꽃 피우지 못하고 이렇게 된 원인이 좌익폭력학생들이 벌려 놓은 일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시절의 좌익폭력학생들의 꿈과 이상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데 있다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물론 이때 내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상주의자로서의 좌익학생은 결코 통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그룹, 일명 주사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는 인정하지만 레닌에서부터는 뭔가 변질되어간다고 느꼈고, 그 이후 현실 사회주의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나의 이상은 정치적이지 않은 순수한 혁명분자들,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라파르그, 그리고 뜨로츠키쪽에 가까웠었다. 19세기의 젊은 혁명가 게오르크 뷔히너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등의 작가- 도 나를 온통 사로잡았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조차 한국보다는 훨씬 행복해 보였었다. 내가 한국이 아니라 공산당 치하의 소련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지금과 같이 한심한 어른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렇다.만약 내가 구 소련에 태어났더라면 그들의 정교한 사회주의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 훌륭한 조기교육훈련을 받고 뭐가 되어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 사회는 재능 있는 자에게는 천국인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돈 있는 자에게 천국이듯이.(이걸 고무찬양이라고 잡아가고 싶다면 잡아가라, 이 떡검들아).동구권의 몰락은 재능은 없으면서도 돈과 명예는 차지하고 싶어 했던 다수의 열등분자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 결코 자본주의의 우월성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단연코 미국과 소련 중 진정한 기회의 나라는 소련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주제와 관계없는 얘기는 여기에서 접어두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요지는 그 동안 나의 음악을 듣는 귀가 매우 훌륭해 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대체로 초등학교 6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용돈과 참고서 값을 아껴가며 판을 사 모았고, 그렇게 사 모은 판이 고등학교 졸업 할 무렵에는 마침내 수백 장에 이르렀다. 그것도 오로지 고전음악만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서 이사 갈 때마다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엘피판들이지만(때로는 경매 붙여서 목돈 좀 챙겨볼까 생각도 하게 만드는), 청소년 시절에 클래식 음반을 그 정도로 사 모은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나의 음반과 나의 음악생활은 나의 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많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그 덕택에 나에게는 추종자도 꽤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열성분자가 한때 영화감독으로 뜨는 것 처럼 하더니 소식이 끊긴 진원석이란 녀석인데, 대학교 2학년 이후 그 녀석과 교류가 끊어진 것이 참 안타깝다. 조금 더 나의 영향을 받았으며 좀더 알맹이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어쨌거나 신기한 것은 팔방미인으로 불리던 내가 음악을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닌 단지 만들어진 음악을 듣는 행위에 그렇게 깊이 몰입 했다는 것, 그것도 무려 30년이나 지나버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점점 그 도가 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이토록 오래 동안 한 우물을 판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그토록 미쳐있었던 등산조차 요즘은 시들한데 그 보다 더 오래된 음악 듣기는 오히려 도가 더 심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한때 음악을 연주하는 일과 작곡하고 지휘하는 일에도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락 한다면서 끄적대었던 20대 후반을 끝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예전처럼 흥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의 관심은 오로지 듣는다는 그 하나의 행위에만 몰입되어 버렸던 것이다. 연주도 싫고, 작곡도 싫지만 듣는 것은 좋다?여기에서 난 한가지 의문을 던져야 했다. 그렇다면 작곡, 연주 그리고 음악 듣기라는 이 세가지 활동은 모두 음악이라는 범주하에 포섭되어 왔지만 사실은 상당히 다른 감성 코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모조리 음악활동이라고 뭉뚱그리는 이 세 가지가 사실은 전혀 다른 감성과 능력을 요구하는 전혀 다른 활동이 아닐까?연주도 작곡도 아닌 음악을 듣는다는 단 하나의 행위가 지닌 마약과 같은 힘. 나를 20년간이나 사로잡고 앞으로도 계속 사로잡을(최근 3년 동안 사 모은 음반이 무려 싯가로 천만원 어치다. 나의 연봉을 고려해 보면 정말 무모하다시피 사 모은 셈이다. 그러고도 파산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그 힘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나는 아주 요상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음악의 존재론적 모순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긴장이 엮어내는 역동적인 자기 파멸적인 힘이 음악을 오로지 듣게 만든다. 연주와 작곡은 이와 다른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아니 대관절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벌써 야유 소리가 들린다. 진중권이 흉내 내려고 하는 짓거리면 이쯤에 그만 두라고 하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라. 난 진중권 보다는 훨씬 겸손하니까. 그래서 난 앞으로 이름 깨나 알려졌다고 하는 양코백이 철학자들의 글은 가급적 인용 안 하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들먹여야 하겠지만, 난생 처음 들어보는 학자의 이름과 그의 야릇한 문장이 인용됨으로써 읽는 이들의 기를 죽이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개똥철학 같은 문장을 만들어낸 것은 순전히 복잡하기 짝이 없이 생겨먹은 음악의 탓이지 절대 내 탓은 아니다. 그러니 탓하려면 음악을 탓하시길. 나도 음악이 너무도 복잡해서 울궈도 울궈도 끝이 없어서 지쳐 쓰러질 지경이니까. 어쨌건 이제 함께 개똥철학을 시작해 보자.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1
에세이, 예술, 음악, 음악감상, 음악에세이, 음악철학, 철학, 클래식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50


 BACH2138 2008년 09월 20일 11시 46분
좋은 글이군요.... 클래식을 코메디화시키는 재미난 동영상 하나 남기고 갑니다.
즐감하세여..........

http://kr.youtube.com/watch?v=zi8xe6bs8 ··· Drelated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사르트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에서 한토막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14일 23시 06분
.....

도스또에프스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바로 이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점입니다. 실제로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따라서 그 결과 인간은 홀로 남겨지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인간은 자기 안에서도, 또 자기 밖에서도 그가 매달릴 만한 그 어떤 가능성도 찾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핑계를 찾지 못합니다. 만약 정말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결코 응고된 채 주어진 그 어떤 인간 본성에 의존하여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즉, 결정론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바로 그 자유인 것입니다. 한편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행실을 정당화시켜줄 가치나 질서를 우리 앞에서 찾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변명 또는 핑계를 우리 앞에서도, 뒤에서도, 가치의 밝은 영역 속에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핑계도 배제된 채 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하면서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고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 자신이 세계속에 던져진 이상, 인간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자는 정념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강한 정념이 인간을 어떤 행위를 향해 숙명적으로 이끌어가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격류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 정념이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는 인간은 자신의 정념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사르트르, 사색, 실존주의, 앙가쥬망, 철학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48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니체 "안티 크리스트"에서 한 토막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10일 16시 23분

......
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믿음을 갖는 행위는 무례한 짓이다’라고.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타락한 인간이라는 증거다. 아무래도 크리스트교에는 ‘효력의 증명’이라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 듯하다. ‘믿으면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믿음은 진리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그 ‘행복’은 증명된 것이 아니라 단지 약속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과 행복을 제멋대로 결부시켰을 뿐이다. 신자가 살아 있는 동안 ‘저 세상’일은 모른다. 약속이 정말 지켜지는지의 여부는 죽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심오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와 반대로 가르친다. ‘진리’란 인간이 오랜 세월을 거쳐 차근차근 애써 쟁취한 것이라고. 그 때문에 인간은 희생을 많이 했고 훌륭한 영혼이 필요한 적도 있었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 정직한 생각, 자신의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아름다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양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든 믿는 사람은 가치를 판단할 줄 모른다. 믿는다 함은 감옥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나 다름없다. 외부세계는 물론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기 발언의 중심이 되므로.

그래도 위대한 정신은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뭔가를 생각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확신에 대한 저항이다. 그들은 확신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고의 주체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뭐든 믿는 사람은 사고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믿는 대상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을 이용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신자는 자기 상실을 명예라고 믿는다. 그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허영심이 그 원인이다. 결국 자기 상실, 즉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는 것이 신앙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강제나 구속을 필요로 하는 노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가치의전복, 개독, 기독교, 니체, 믿음, 반기독교, 신앙, 안티크리스트, 철학, 확신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46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에피쿠로스의 편지들 중 일부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09일 11시 27분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신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추측들)-이것 때문에 마음에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깊음이다. 사려깊음은 심지어 철학보다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탁월함들은 사려깊음에서 생겨나며, 이는 우리에게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사는것도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탁월함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즐거운 삶은 탁월함으로부터 뗄 수 없다.

정말로 그대는 신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의 목적을 잘 계산한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사람은 우리가 좋은 것들의 한계를 충족시키거나 얻기쉽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며, 반대로 나쁜 것들의 한계는 시간적으로 짧을뿐더러 경미한 고통을 가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운명 -어떤 이들은 운명을 만물의 주인이라 불렀지만- 을 비웃으며, 우리의 행동 -이들 중 어떤 것은 필연에 의해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 또 다른 것은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난다- 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연에는 아무 책임이 없으며, 우연은 유동적이며,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은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이나 비난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다.”

정말로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신에 대한 신화를 듣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에 따르는 것은 신들을 존경함으로써 달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해 주는 반면,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은 달랠 수 없는 필연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연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녀하면 신의 행동에는 무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사려 깊은 사람은 우연을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큰 선 또는 악을 위한 기회가 우연에 의해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의하면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큰 성과를 이루는 것보다는 이성적으로 숙고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편이 낫다. 왜냐하면 잘못된 판단을 내렸으나 우연 때문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옳게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자신의 판단을 입증하지는 못한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을 그대 스스로뿐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밤낮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내는 자나깨나 고통받지 않게 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신과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하는 선 속에서 사는 사람은 사멸하는 존재들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고대사상, 그리스철학, 명언록, 목적론, 에피쿠로스, 유물론, 윤리, 윤리학, 철학, 쾌락주의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45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결국 도덕이란 자유의지가 법칙에 따라 행하는 것?(칸트의 윤리형이상학정초에서)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07일 06시 32분

....인과성 개념은 법칙들의 개념을 동반하는 바, 이 법칙들에 따라, 우리가 원인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의해 다른 어떤 것, 곧 결과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는 비록 자연법칙들에 따르는 의지의 성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혀 무법칙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변적인 법칙들에 따르는 원인성이되, 그러나 특수한 종류의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유의지란 무물일 것이니 말이다. 자연필연성은 작용하는 원인들의 타율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작용결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원인을 원인성으로 규정한 법칙에 따라서만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가 자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인 의지의 성질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법칙이다’라는 명제는 단지, 자기 자신을 또한 보편적 법칙으로서 대상으로 가질 수 있는 준칙 외에 다른 어떤 준칙에 따라서는 행위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정언 명령의 정식이자 윤리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와 윤리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는 한가지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가 전제된다면, 윤리성 및 그것의 원리는 그로부터 그 개념을 순전히 분배만 하면 나온다. 그럼에도 윤리성의 원리는 언제나 하나의 종합 명제, 즉 ‘단적으로 선한 의지는 그것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으로 보인, 자기 자신을 자기 안에 함유할 수 있는, 그런 의지이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선한 의지라는 개념의 분해에 의해 준칙의 저런 성질이 발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합 명제들은, 두 인식이 그것들과 양쪽으로 만날 수 잇는 제3의 것과의 연결에 의해 서로 결합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의 적극적 개념이 이 제3의 것을 마련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도덕법칙, 도덕형이상학정초, 윤리, 윤리학, 윤리형이상학정초, 의무론, 자유, 자유의지, 철학, 칸트, 칸트윤리학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43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에서 한 토막
철학 한 토막 | 2008년 09월 01일 12시 55분

밀의 책을 읽다가 문득 느낌이 와서 옮겨 놓는다. 사람들이 실용, 효용을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효용에다 편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원리를 손쉽게 대비함으로써 비도덕적인 이론이라고 부당하게 낙인찍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옳은 것과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편의는, 이를테면 정치인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이익을 희생하는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행위자 본인의 특정 이익을 뜻한다. 이것보다 나은 의미를 굳이 찾자면 그것은 무엇인가 눈앞의 일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대신 훨씬 높은 수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편의는 유용한 것과 동의어가 되기보다는 해로운 것의 한 지파를 형성한다. 일시적인 당혹감을 이기려고 혹은 당장 유용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이 때로 편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진실함이라는 문제에 대해 예민한 감정을 고양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반면,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리를 배신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현재의 모든 사회적 복리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원군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충분할 때는 문명과 덕, 그리고 인간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변수보다도 더 심각하게 저해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현재의 이익을 위해 초월적 편의에 관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결코 편의를 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나 다른 어떤 개인의 편리를 위해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고, 그 결과 인류의 이익을 해치고 그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가장 나쁜 일을 하는 셈이 된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공리, 공리주의, , 실용, 실용주의, 윤리, 윤리학, 존슈튜어트밀, 철학, 효용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38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근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는 동의어다.
철학 한 토막 | 2008년 08월 27일 14시 44분

근본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 유연한 프로테스탄트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애초에 종교개혁의 발단이 근본주의적이었으니.
흔히 알려진것처럼 루터나 칼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화나 독재, 혹은 부패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면죄부에 반대한 것도, "돈을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에 의한 구원을 정당화하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기실 부패와 정치화가 아니라 토마스주의 및 스콜라 철학과 싸웠다. 즉 신앙을 점점 이성 아래에 넣으려는 시도에 반발한 것이며, 신의 존재, 신의 뜻을 인간의 이성과 추론으로 찾아내고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반발한 것이다. 토마스 주의의 극단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존재와 정당성의 근거를 갖게되는 신이었으니... 그 무수한 신존재증명들을 보라.

루터는 이러한 후천적 노력와 이성적 파악에 반대하여, "성서속의 진리"와 "오로지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성서의 내용은 이성적 추론의 대상이 될수 없는 무조건적인 진리이며, 구원에의 길은 인간의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지소관인 바, 오직 복종하고 뜻에 맡기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북부유럽의 가부장적 군주정과 잘 결합하는 논리였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적 인간형이 등장한다. 그는 사회, 인류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직 성서 안의 말씀과, 맡은 바의 작은 일만 개미처럼 성실하게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없이 살면서 자신의 구원을 오직 신의 뜻에 위탁하는 자, 그게 프로테스탄트적 인간이다. 그러니 이들이 자본의 초기 축적에 지대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정신이 왜곡되어 기독교가 근본주의화 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그 자체가 이미 수백년 전에 일어난 기독교의 복음주의, 근본주의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개독, 개독교, 개신교, 교회, 근본주의, 기독, 기독교, 복음주의, 진보, 철학, 프로테스탄트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33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철학의 도피
철학 한 토막 | 2008년 08월 26일 21시 03분
일찍이 로마제국 말기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인생의 가장 참혹한 순간에 "철학의 위안"을 썼다.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진 그 책은 문자 그대로 철학이 의인화 되어 작가에게 위안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 책을 처음 비웃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철학과는 너무 멀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해석만 할 것이 아니라 변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경구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을때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근래 다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하긴 요즘 철학책을 무척 많이 읽는다. 얼마 전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그냥 워드질로 옮겨놓기까지 했다. 이제는 "정신현상학"을 읽을 참이다. 그 정밀하고 두뇌를 혹사시키는 문장들 속에서 씨름을 하다보면 삼매지경에 빠진다. 어쩌면 내가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삼매지경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쇼펜하우어가 예술에서 찾던 것을, 나는 철학에서 찾는것인지도....

그냥 만사를 잊고싶다. 윌리엄 제임스는 "정신현상학"을 읽고 철학이 골방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나는 도리어 정신현상학을 읽으면서 세상으로부터 퇴각해서 골방속의 삼매경에 빠지려 하고 있다. 비겁하고 비겁하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슬픈 시절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답답한현실, 도피, 삼매지경, 정신현상학, 철학, 철헉의위안, 피안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31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기독교에 대하여
철학 한 토막 | 2008년 08월 25일 12시 01분
나는 천주교 신자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냉담자다.
지난번 정의구현 사제단의 시국미사때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번 주교단 회의에서 사제단에게 징계성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 울컥을 회수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지만, 난 아무리 봐도 그 기대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도 기독교는 기독교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기독교는 유일신이자 인격신,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지고 있는 원죄, 그리고 예수에 의한 속죄와 희생을 믿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바로 이 공통의 신앙 요소들이 결국 사회정의에는 걸림돌이 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이 신앙 패키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절대권력에 이용하기 좋은 요소들만 편집해서 니케아 공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반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절대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원시기독교의 요소들, 특히 영지주의와 관련한 요소들은 모두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결국 바울의 기독교만 남게 되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로 애초부터 로마에 선교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로마인들에게 용납되기 쉽도록 기독교 교리를 재편하였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모두 바울에서 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이 흐름의 여러 곁가지에 불과하며, 이 흐름은 하늘이 두쪽나도 기존의 권력을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예수의 전복적인 삶과 저항적 시도들을 일컬어 예수는 혁명가였다고 하면서 추종한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거의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수는 존경할만한 과거의 전범이자 위인이 되지 신이 되지는 못한다. 예수의 저항적 삶을 따라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신앙"에 의해 "수동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자세가 바로 모든 기독교의 공통요소인 것이다. 기독교 어디를 뒤져 보아도 "능동적 구원과 해방"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전통적인 구복신앙과 결합된 세속적인 한국 기독교야 오죽하랴? 천주교 역시 신자들의 SES가 높아서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 구복신앙이긴 마찬가지다.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비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개독교, 기독교, 신앙, 종교, 진보, 천주교, 철학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30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진보가 우파를 비판할 때
철학 한 토막 | 2008년 08월 19일 14시 20분

체계의 외부에서 행하는 비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정한 비판은 그 체계의 내부에서, 그 체계의 논리를 이용하면서 그 모순을 첨예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사실 체계의 외부에서 아무리 비판해 보아야, 그 체계 내의 사람들은 이미 비판자와 공유하는 배경, 선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외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조선일보만을 세계의 창으로 알아왔던 사람에게 마르크스의 개념틀에서 이야기해 본들 그것은 고함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동안 좌파들은, 진보들은 이런일을 해 온것이 아닐까? 민중들이 혹은 시민들이 갖고 있는 기존의 세계상, 이해의 지평을 이해하고, 그들의 개념과 그들의 세계상 속에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등 우파 꼴통틀의 비판도 그들 앞에서 고함을 칠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념과 그들의 언어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아이러니로 몰고가야 한다. 왜 그런 친절을 하냐고? 꼴통들은 자기들의 지평에서만 사유하며, 자신들의 지평도 명시하지 못하지만, 진보는 자신의 지평뿐 아니라 타인의 지평도 훤히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파의 세계상의 배경을 꿰뚫어 보고, 그들의 논리와 개념들을 이용하여 아이러니를 만들어낼 수 있을때 비로소 비판은 가능하며, 그들에게 감염된 민중들을 끌어올 수 있으며, 진보끼리의 비판적 자위행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파들조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공통의 영역, 즉 고전, 공식적 지식의 영역에 해박하고 탁월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진보적 관점을 가질때 그런 영역에서도 더욱 탁월할수 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참 지식은 반성에서 비롯되며, 반성은 이미 비판적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개념틀, 보수, 비판, 비판이론, 우파, 좌파, 진보, 철학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27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촛불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
철학 한 토막 | 2008년 07월 04일 11시 00분
조정환 선생께 미안!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조정환(자율평론)

1. 머리글

2008년 5월 2일에 시작되어 오늘(5월 26일)까지 56일 동안 지속되고 있는 촛불봉기는 연쇄적으로 확산되면서 제기된 그들의 요구들 중 그 어느 것도 아직 결정적으로 쟁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무력해 보이는 촛불봉기는 폭발의 순간에서부터 그 소용돌이치는 일련의 전개과정 속에서 기존의 낡은 고정관념들과 관습들, 그리고 관계들 모두를 송두리째 찢어버렸고 새로운 삶의 도래를 요청하고 또 증언하는 불가사의한 ‘괴물’로서 지금도 광장과 거리와 가정과 온라인 연결망 곳곳에 충격과 쇄신의 힘을 불어넣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잊고 거리에서 열정적인 시위와 토론에 열중하며 일상에서 눌변으로 굳게 닫혔던 입들이 다변으로 활짝 열려 감동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언설을 쏟아내고 마음 깊은 곳에 잠복해 있던 해학력과 상상력을 터뜨리며 거대한 무리의 행위예술을 공연한다. 시위가 종합예술이 되고 밤에 이루어지는 거대한 소비활동이 새로운 삶을 빚어내는 용광로가 되며 앞섰던 자가 뒤서고 뒤에 섰던 자가 앞서며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지금까지 내내 배우기만 했던 사람이 가르치며 이른바 ‘지도자’들이 훼방꾼으로 기능하고 이른바 ‘열패자’들이 투사가 되며 지식인이 무지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대중이 지성의 불을 내뿜으며 늘 지도부를 자임했던 정당이 다중의 행동을 생중계하는 매개자로 되는 이 총체적 역전과 융합(퓨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촛불봉기의 이 매혹 때문에 촛불이 타오를 때는 그 열기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촛불이 잠잠해지면 안타까움과 불안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비가 오면 혹시나 촛불이 꺼질까 우비를 챙기고 집을 나서며 누군가 다칠까봐 지켜보는 눈이라도 되어 주어야겠다며 집을 나서고 시위대가 배고플까봐 김밥과 우유를 싸들고 집을 나서고 아예 저항의 노숙을 하자며 텐트를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지난 56일은 이 짧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봉기대는 소라광장에서 시작하여 시청광장으로 이동했고 신세계, 퇴계로, 동대문으로 이동했으며 남대문, 명동, 종로, 대학로를 휩쓸었고 청와대로 가기 위해 청운동, 안국동을 점거했다. 이어 봉기대는 KBS, 한나라당사, 코엑스에서 촛불을 지폈으며 마침내 전국 곳곳에 뒤늦었으나 더 강렬한 촛불들이 켜지고 국경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생명의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벌떼들이 이곳저곳을 이동하듯이 지구상의 여기저기를 밝히며 촛불의 봉기(蜂起)는 지속되고 있다. 봉기란 글자 그대로 ‘벌떼들(蜂)의 일어남(起)’이 아닌가?


2. 촛불봉기의 발생조건

5월 2일의 촛불봉기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 수입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쇠고기가 유통되지 않아야 하고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당연한 요구가 어째서 수용될 수 없었는가? 얼핏보면 사소해 보이는 이 쟁점이 왜 범국민적 봉기를 야기시키기에 이르렀는가? 수 십 일에 걸쳐 연 수백만의 사람들이 촛불시위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왜 현재까지 생명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국민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고 한미간의 쇠고기 협상은 고시의 강행을 앞두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의 권력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면서 삶을 지배한다. 촛불봉기를 통해 연이어 의제화된 수도, 의료, 건강보험 등등의 신자유주의적 민영화는 쇠고기와 더불어 직접적으로 생명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대운하 건설, 교육 및 공기업들의 민영화 등도 생태나 사회적 삶의 생산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 등 노동자들의 오래된 쟁점 외에 정리해고, 노동의 불안정화 등의 쟁점이 추가된 이후 이제 생명의 안전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권력은 이처럼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관계 조정이라는 매개 역할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생명과 사회적 삶을 지배함으로써 유지되는 삶권력으로 변형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삶권력은 90%의 인구를 사회적 부에서 배제시키고 오직 10%의 인구만이 부를 독점하는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유효수요를 극단적으로 감소시킴으로써 자본의 경제위기를 일상화한다. 공급과잉으로 인한 과잉생산 위기, 부채상환의 곤란으로 인한 부채위기는 곳곳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며 이것들은 부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끔찍한 생활상의 고통으로, 요컨대 삶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러한 위기는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사회의 경계 지대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줄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노동자들에게는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고 있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대중들 속에 분노의 기름을 거대한 규모로 축적하면서 발화의 시점만을 기다리는 휴화산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제의 계급적 한계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2003년 대중들의 지지에 기초하여 집권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자신을 지지한 대중에게 신자유주의 폭탄을 돌려주었으며 2008년 집권한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못다한 신자유주의화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완성하려 했다. 돈을 벌고자 하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부자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 전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이들을 생존 이하의 수준으로 밀어넣는 법과 제도개편을 시도했다. 대운하, 상수도 및 의료의 민영화, 그리고 이른바 ‘미친교육’ 등은 그러한 시도의 일부이며 열린우리당이 마무리하지 못한 FTA 국회비준도 그것에 속한다. 야당이 된 통합민주당은 이러한 시도들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며 실제로는 동조하고 있었다. 사회 전체의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경제적 손실, 정치적 권리상실, 문화적 열악화를 겪으면서 생존의 경계선으로 밀려났거나 점차 밀려나는 사람들은 대의되지 못함에 대한 불만과 무력함에 시달렸다.

소외된 사람들을 대의하기 위해 탄생한 민주노동당이나 이에서 분당한 진보신당 역시도 이들의 불만과 무력함을 해결할 어떠한 근본적 비전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선거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가 나타났다. 촛불집회에서 호소되는 ‘꽉 막힌 소통’에 대한 비판이 대의제의 절대적 위기에 대한 다중의 감각을 표현한다. 입법, 행정, 사법의 정치권력 전체가 다중들의 요구와 불만을 대의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내외 산업적 금융적 기업들의 자본권력과 야합하여 다중들의 능력뿐만 아니라 생명자체까지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삼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체제! 이 체제를 유지시키는 또 하나의 권력이 미디어 권력인 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찌라시’ 신문들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관심사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의제화하여 그것을 다중들 전체의 관심사로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서의 역할을 뻔뻔하게 수행하고 있다. 미디어 권력은 매일매일 권력과 자본에 이로운 여론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기적으로 정치권력화하며 촛불봉기와 같은 저항적 흐름은 폭도들로 매도한다. 이를 매개로 자본의 물리적 정신적 권력들 사이의 신성동맹 체제가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실질적 대의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중들은 로또적 요행을 기다리며 실의의 나날을 보내거나, 알콜에 의지하거나, 노숙을 하거나, 억화심정과 과로노동으로 약국과 병원을 오가다가 죽거나, 아니면 자살을 하는 수밖에 없는 비참을 강요당해 왔다. 촛불봉기는 이 비참을 거부하겠다는 다중의 결의의 표현이며 이 거짓된 대의제를 통해서는 자신들의 삶의 고통과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자각의 표현이고 직접행동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보겠다는 선택 그 자체이다.

이 봉기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원천들은 깊고도 넓다. 이것은 결코 쇠고기 수입의 위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대운하, 민영화, 교육 등의 정치적 사회적 쟁점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채식동물에게 동물사료를 먹여 그 동물을 미치도록 만드는 현대의 반생명적 문명, 오염된 음식을 팔아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고서는 굴러가지 않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생태계와 그 주민들을 해치는 정책들을 그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도 강행하는 부르주아 권력체제 모두가 현재의 봉기가 다투고자 하는 잠재적 문제들이며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한국의 그리고 전 세계의 다중들 모두가 이 문제의 이해당사자이자 이 봉기의 잠재적 동력으로 배치되어 있다.


3. 전개과정

가. 촛불봉기의 전사

촛불이 권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 시위의 상징적 무기로 등장한 것은 2002년 11월 30일 광화문에서 열렸던 <효순-미선이 추모 촛불시위>에서였다. 이 날 아이디 ‘앙마’의 제안을 펌질을 통해 확산시킨 이른바 ‘네티즌’들은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1만여 촛불을 밝힘으로써 탈근대적 시민으로서의 그 모습을 오프라인 공간에까지 드러냈다. 일주일 뒤인 12월 7일엔 5만개의 촛불이 켜졌고, 다시 일주일 뒤인 14일엔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광화문을 ‘촛불 바다’로 만들었다. 이해 이들 네티즌들은 월드컵 응원전의 신화를 만들어냈고, 보수언론의 왜곡편파 보도를 견제했으며, 또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신 노무현을 당선시킴으로써 정치적 보수를 저지했다. 이 흐름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파병반대운동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기존의 근대적 민중운동 및 시민운동과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촛불은 이어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점화되어 이어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국회 과반의석을 넘도록 만들고 노 대통령을 두 달간의 직무정지에서 구출하여 청와대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었다.

나. 촛불봉기의 발전단계

1) 5월 2일~5월 23일: 촛불의 점화와 촛불집회

2008년 5월 2일 안티이명박카페 주도로 이명박탄핵을 위한 촛불집회가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열렸다. 그 중 70%가 중고생이었다. 중고생으로 표현되는 청소년들은 영어몰입교육과 공교육자율화 조치로 심한 영어학습 부담을 갖게 되었고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의 부활로 잠을 못자면서 강제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강제교육에 이렇듯 경쟁적으로 내몰리는 가운데 광우병 협상이 타결되어 급식의 위험마저 느낀 청소년들은 현존하는 사회의 불합리와 권력의 맹목에 항의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고등학생 안단테가 주도한 이명박 탄핵을 위한 서명은 5월 2일 당시 이미 60만을 육박하고 있었다.
이어진 촛불집회에는 참교육 운동을 해온 전교조가 동참하여 미친소-미친교육 반대를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외쳤다. 대운하 건설반대, 상수도 민영화 반대, 의료민영화 반대, 건강보험 민영화 반대, 공기업 민영화 반대 등 이명박 정부의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광장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다양한 쟁점이 합류했지만 초기의 요구는 이명박 정부의 퇴진 혹은 탄핵으로 집약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국가권력의 재구성을 통해 다양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권력 일반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국가권력, 국가정치의 문제로 환원하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시민들, 네티즌들, 국민들, 민중들로 불리는 다양한 사회적 존재들의 촛불봉기는, 한편에서는 권력을 일자의 지배로 환원하는 위계적 중앙집권적 국가권력 대신에 다양한 존재들인 그들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권력(실제로는 권력이 아닌 권력으로서의 준권력)으로서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 권력을 직접 행사함으로써, 그리고 그 행사되는 권력들의 연결망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그 생명력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반면 그 지향에서는 이렇게 국가권력의 표상에 묶인 상태에서 출발했다.

뒤이어 1700여개의 시민사회단체들로 이루어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에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구성되어 집회에 연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 구성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책회의는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이라는 문제에 촛불집회의 초점을 맞추었다. 광우병 위험은 인간이 동물성 사료를 채식동물에게 먹임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며 이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행하는 맹목적인 자본주의 질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산 소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동물성 사료를 사용하는 모든 소(한국산 소까지 포함하여)들도 이러한 위험을 안고 있다. 요컨대 많은 단체들의 대책회의로의 결집은 촛불집회의 쟁점을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한정하고 쟁점을 단일쟁점으로 환원했으며 퇴진 주장보다 좀더 문제를 민족주의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배적인 구호도 ‘고시철회, 협상무효’로 협소해졌다. 17차 촛불집회까지 쟁점의 이러한 협소화가 진행되었다.

2) 5월 24~6월 1일: 거리시위로의 전화

이러한 흐름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아고라이다. 아고라는 촛불의 최초의 문제제기가 협소화되고 권력문제에서 협상문제로 퇴행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5월 24일 광화문에서 독자적으로 거리시위를 준비했다. 이것은 촛불집회의 명목적 지도부를 자임하고 나선 대책회의측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서 이후 자발적인 대중적 거리시위를 이끌어내면서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다시 대중화시켰다. 그러나 대책회의와 그 내부의 주요한 동력인 다함께는 ‘고시철회, 협상무효’라는 구호에 집중했고 퇴진 구호를 장식적 요구로 밀어냈다. 이것이 5월 말 촛불봉기 내부에서 점화된 지도 논쟁의 맥락이다. 대책회의와 다함께는 거리시위대의 선두에서 현재의 핵심쟁점을 단일쟁점으로서의 쇠고기 협상에 모으기 위한 구호들을 선창했다. 아고라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면서 다양한 쟁점들을 권력 문제로 모으고자 하는 흐름은 선도차량과 확성기의 사용을 비판하면서 거리행진이 자율적으로 진행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촛불봉기는 대책회의의 공식집회(7시부터 9시), 자발적 거리시위(9시~11시), 그리고 이후 어떤 지도부도 없이 이루어지는 경찰과의 대치투쟁과 강제진압(11시~새벽까지) 등으로 진행되었다.

3) 6월 1일~6월 10일: 촛불상승

쇠고기 협상의 관보고시가 6월 3일로 예정된 가운데 마지막 맞은 토요일인 5월 31일에 10 만 명이 모인 촛불집회는 청운동과 삼청동 방향에서 청와대 진격을 시도했다. 강경진압에 나선 경찰과의 치열한 대치 끝에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부상당하면서 아침 8시경까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을 통해 지금까지 방법을 둘러싸고 내적으로 긴장관계에 있었던 경향들 사이의 연대감이 싹트고 서로의 약점을 고치고 보완하는 방향에서 상당한 정서적 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대감 덕분에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하며 참가하고 노동자들까지 참가하여 6월 10일에는 전국에서 집결한 100만의 촛불이 이명박 정권에 일대 타격을 가하게 된다.

4) 6월 11일~6월 19일: 대기, 긴장, 잠복국면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추가협상을 한다, 대운하 계획을 포기한다, 민영화를 임기중에는 하지 않는다 등의 기만적 물타기 전술을 구사하면서 집회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고 실제로 촛불집회 참가인원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면 13일에 시작된 화물연대 파업과 16일에 시작된 건설노조파업 등의 노동자 파업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이 시기에 시청광장에서의 집회가 자유발언-거리행진-해산으로 이어지는 일상화된 공식집회의 성격을 가졌던 반면 KBS 앞에서는 아고라와 안티이명박을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이 공영방송사수를 외치면서 전선을 확대시켰다. 6월 17일에는 여의도, 코엑스, 시청 등 세 곳에서 다양한 이슈의 촛불이 켜졌다. 대책회의는 전선이 확대되는 가운데 촛불집회 참가자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향후 촛불집회의 방향을 토론하기 위한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했다. 논점은 재협상요구인가 퇴진운동인가로 모여졌지만 24일과 27일 두 번에 걸친 후속 토론을 예정한 후 6월 20~21일을 48시간 국민행동의 날로 정해 21일에는 다시 5만 이상의 촛불이 시청에 집결했다. 정부가 기만적 조치들 외에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 21일에는 시위대들의 투쟁도 격화되었다. 그 결과 6월 10일에는 장시간의 토론을 거쳐서야 컨테이너 바리케이드(이른바 ‘명박산성’) 위에 올라갔던 것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모래로 만든 국민토성을 쌓아 전경차 지붕을 점거했다.

5) 6월 22일~현재: 보수반격과 대치국면

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은 시위대에 대한 소화기분말 분사나 불법연행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단체를 동원한 촛불시위자 폭행, 포털사이트 다음에 대한 세무조사, 인터넷 실명제 추진과 사이트카 제도 도입을 통한 언론자유 제한, 소비자 운동에 대한 협박 등 강경대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지식인 이문열은 촛불집회에 대항할 의병을 조직할 필요성이 있다며 HID, 한기총, 뉴라이트, 고엽제 피해자 모임 등의 역반란을 선동하고 있고, 최장집 교수 등은 대의민주주의만이 대안이라며 촛불봉기에서 제기된 의제를 국회로 가져가야한다는 퇴행적 주장을 하고 있다.


4. 자본권력의 대응 변화

가. 이데올로기 조작: 5월 2일~27일(배후론, 본보기 연행과 협박)
나. 탄압: 5월 27일~6월 1일(불법연행, 물대포, 소화기)
다. 일시적 후퇴와 방어, 보수단체 동원한 간접 대응: 6월 2일~6월 11일(차벽쌓기와 명박산성, HID 추모집회, 뉴라이트 서경석 목사 거리선동)
라. 기만: 6월 11일~6월 22일(촛불 소멸론, 추가협상, 기만적 사과, 대운하 민영화 포기 제스쳐, 감성에 호소)
마. 반격: 6월 23일 이후(고엽제 피해자, 뉴라이트의 시민폭행, 대책회의 탄압, 6월 24일 이명박이 불법시위 엄격대처 주문, 6월 25~26일 집회와 시위 물대포 재등장, 강경진압)


5. 촛불봉기의 특징과 새로움

가. 자발성과 창의성

2008년 촛불봉기는 촛불집회, 촛불시위, 촛불행진, 촛불항쟁, 촛불문화제, 국민토론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발성이다. 5월 2일 첫 집회는 어떤 지도부도 없이 고등학교 2학년 ‘안단테’가 4월 6일에 시작한 이명박 대통령 탄핵 청원에서 시발했다. 이것은 2002년의 효순-미선 추모 촛불시위가 학원강사 ‘앙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과 유사하다. 한 사람의 제안이 들불처럼 퍼져서 수만의 사람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광장으로 모았다. 곧 이 자발적 촛불집회에 대형단상과 앰프 마이크를 설치한 대책회의가 결합했지만 참가자들은 자발성을 억제하는 대책회의의 행태에 비판적이었다. 마이크 사용을 자제하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5월 24일부터의 가두시위도 대책회의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 움직임들에게 넓은 공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운동을 일사분란한 계획 속에서 지도하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책회의의 진행방식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거리시위가 시작된 후 이번에는 대책회의에 소속된 다함께가 거리시위대오를 선도하기 위해 대오의 선두에서 행진방향을 제시하고 구호를 선창했다. 이것도 자율적 참가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했다. 다함께는 결국 대량으로 배포해온 손피켓에서도 자신의 조직 이름을 삭제해야 했다.
5월 하순 이후 청와대 진출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전경대와의 치열한 접전 역시 대책회의의 관리범위를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의도, 코엑스로의 촛불의 확산이나 전국 곳곳에서 불붙은 지역 촛불들도 자발적인 것이었다. 피켓제작을 비롯하여 집회나 시위를 풍부하게 만든 많은 재기 넘치는 형상물들도 참가자들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구호들도 즉석에서 무작위 개인들의 임의적 선창에 호응하여 그때그때 창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연호되어나갔다.
물론 대책회의에서 구상되고 제안되어 참가자들에게 받아들여진 많은 행동들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특히 72시간 릴레이 집회, 국민대토론회, 48시간 집중행동 등을 비롯하여 굵직굵직한 일련의 행사들과 일정들은 대책회의에서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그 일정을 따른다기보다도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그 일정을 활용했고 그것이 자신들의 계획과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독자적으로 집회나 시위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런 의미에서 대책회의도 광범위한 봉기의 바다에 떠있는 무수한 배들 중 규모가 큰 한 척으로 기능하는 셈이었다.
광장과 거리의 다중들은 정치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창조해 내고 있다. 경찰서를 지날 때는 연행자를 석방하라, 연도의 시민을 향해서는 민주시민 함께해요, 조중동 앞을 지날 때는 전기 아깝다 불꺼라! 당황한 경찰이 도망칠 때는 ‘놀아줘! 가지마!’ 뒤따라오던 전경이 멈춰서면 ‘오빠 같이가!’ 물대포가 쏟아질 때는 ‘온수! 온수!’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에게는 ‘노래해, 춤춰봐!’ 창조적 시위는 해학과 익살이 넘치는 봉기공간을 구축했다.

나. 자율성과 권위에 대한 거부

자발성은 자율성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자율성은 권위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했다. 봉기 참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폭넓게 관용하면서 타인이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거부했다. 촛불봉기의 최대의 집중점이 대통령 이명박의 일방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이명박 정권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대운하 건설, 교육 의료 건보 상수도 등등의 민영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권위적 태도를 보였다. 촛불봉기 참가자들은 이러한 태도에 분노하면서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고 그것은 6월 10일 세종로와 안국동에 설치되었던 거대한 컨테이너 장벽이 상징하듯 국민의 소통 요구에 대한 철면피적 거절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편에서 촛불봉기의 요구에 반응하는 듯한 기만적 추가협상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물대포 소화기 등의 살상위험이 있는 무기를 시위대에게 사용하는가 하면 평화적 거리행진을 전경의 몸과 방패와 몽둥이로 강제해산시키고 HID 고엽제피해자모임 등의 준군사적 사조직을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고 조선 중앙 동아 등의 미디어와 한기총 뉴라이트 그리고 학교의 교장 교감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동원하여 촛불집회에 대한 정신적 폭력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LPG 가스통, 각목, 파이프 등이 이용되는가 하면 ‘좌익’ ‘빨갱이’ ‘배후’ 등의 낡아빠진 이데올로기적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권위주의 정부는 이처럼 물리적 정신적 폭력장치를 기회 있을 때마다 사용하면서도 어떤 형태로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폭력-불법 집단, 즉 ‘폭도’로 몰기 위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촛불봉기자들은 봉기대오 내부에서 어떤 다른 유형의 권위주의도 발생하지 않게끔 억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권위주의적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면서 자신들이 권력과 동질적이거나 대칭적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존재들임을 세심하게 입증해 나갔다. 폭력사용을 최대한 피하자는 광범위한 비폭력 호소는 스스로의 행동반경 행동방식 행동능력을 제한하는 것으로도 작용했지만 권력의 폭력이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낼 만큼 과격하지 않은 한에서 폭력적 권력과 자신을 질적으로 구분하고 윤리정치적 우위성을 획득함에 있어서 유효한 것으로 작용했다. 바로 이러한 반권위주의는 촛불봉기 내부에서 조직적 권위가 형성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모두가 동등한 권한을 갖는 참가자로서 서로 연결되어 ‘다르게 그리고 함께’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봉기문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 촛불운동의 주체구성

지금까지의 민중운동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 빈민, 학생,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운동의 주체들이 꾸려졌다. 시민운동은 계급성에 의거하기보다 어떤 출신이건 국가를 혁신하는 데 관심을 갖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주체로 호명했지만 그것은 주로 소비자, 유권자, 납세자로서의 사회적 존재들에 의거했다. 촛불운동의 주체는 매우 다양하다. 촛불운동 속에서 우리는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주체들의 거대한 합류를 볼 뿐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주체들의 부상을 본다. 무엇보다도 인터넷과 핸드폰 등 디지털 정보매체에 의해 연결된 넷티즌이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나섰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있는 세대, 연령, 직업, 계층 등을 불문한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교복 입은 10대들, 팔짱 낀 20대 연인들, 하이힐 신고 명품가방을 든 여성 직장인들, 유모차 앞세운 주부들, 아이들 무동 태우고 나온 가장들,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촛불집회를 선도하기 시작했으며 민주노총의 노동자들, 전교조의 교사들, 한총련의 학생들, 각급 시민단체의 회원 등 전통적 시위세력들은 나중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예비군, 예술가, 작가, 의사, 해커 등도 각자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갖고 결합했다. 촛불봉기는 글자그대로 잡색부대이며 생각, 욕망, 성향, 기질, 경험의 엄청난 다양성을 갖고 있다. 촛불운동이 단일한 목적과 방향을 갖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촛불들의 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을 넘어서 서로를 이어주는 공통지반을 찾고 이 잡색부대가 매일매일의 촛불의 삶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공통되기의 물질적 과정이 오히려 필요하다.

라. 단일한 목적과 방향, 단일한 조직, 단일한 투쟁방식에 대한 거부

지금까지의 민중운동은 운동의 목적과 방향에서 대개는 단일한 목적, 단일한 방향을 추구해 왔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뚜렷한 방향설정과 이를 위한 민중의 국가권력 장악이 그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자발적 투쟁 외에 당의 지도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목적으로 간주되었고 당의 지도에 대중의 운동이 복종하는 것이 필요했다. 노동조합들, 농민조직들, 학생조직들 등이 일사분란하게 당의 지도를 따를 수 있는 통일된 조직구조로 배치되는 것이 또한 필요했다.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에 비해 다양한 조직형식을 허용하고 사회운동단체 사이에 단일한 목적을 갖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운동을 통한 국가개혁이라는 단일목적 아래로 그 활동들은 수렴되었다.
촛불운동은 어떠한가? 촛불운동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되었지만 즉각 미친교육 중단과 결합되었고 다시 운하사업과 민영화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부자편중의 산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집단적 거부로 연결되었다. 요구들, 거부들, 불만들의 거대한 합류가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서로의 문제로 빠르게 공유되어 갔다. 그것은 재협상 운동으로 한정되기를 거부하면서 계속 그 목적들을 증폭시켰다. 그렇다면 이명박 퇴진은 촛불봉기의 단일한 목적으로 될 수 있는가? 재협상이라는 목적보다 이명박 퇴진이라는 목적은 일거에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촛불봉기가 이미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 문화, 권력의 현 단계의 발전에 의해 발생되고 있는 만큼 이명박 정부의 퇴진만으로 그 원인 전체를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권력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한 2008년 촛불봉기는 2002년 이후 이어져온 미군에 의한 무고한 죽음에 대한 항의, 전쟁에 대한 반대와 파병에 대한 반대, 보수적 의회권력의 횡포에 대한 항의 등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들이 보여주듯이, 촛불은 단일쟁점 운동인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고 규탄하고 해결하려는 존엄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고 사전에 규정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개개의 사안 속에서 목적과 방향을 생산하고 발명해 나가는 성격을 갖는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국민대토론회는 이중성을 갖는다. 한편에서 그것은 촛불봉기에서 제기한 다양한 목적들과 방향들을 합류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고 촛불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전황점검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단일한 정치적 목적으로 환원되기기 어려운 다양한 목적과 방향을 내적으로 갖고 있는 촛불운동을 단일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정지으면서 전통적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의 상 아래로 촛불운동을 포섭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단일한 전략, 단일한 전술이라는 관념은 위험하다. 개인들, 소모임들, 단체들 각각이 각기의 생각과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전술들을 구사할 수 있는 분위기와 문화의 조성이 단일한 전략, 전술의 설정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촛불의 잠재력을 살려나가는 길이다. 이 공통관계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는 대립적인 전술들과 행위들까지 관용되는 것이 필요하다. 촛불들이 지금까지 제기한 문제들과 쟁점들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재협상으로도, 이명박 퇴진으로도 충분히 풀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촛불들은 지금까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 그것들이 풀 수 없는 근원적 생명존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 고유성이 있다. 촛불봉기의 요구들을 잠재적 차원까지 고려할 때 촛불들은 자신을 제헌권력으로, 준-권력으로 자각하고 또 실제로 행사하는 영구적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내재적 목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 촛불의 권력

촛불의 권력의지--이것은 결코 국가권력에의 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닌 반권력 혹은 준권력의 의지이다--는 잠재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고 간헐적으로 표현된다. 지금 그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1조에 의지해서 협소하게 그러나 맹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직까지 촛불의 권력의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권력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스스로를 이명박을 퇴진시키거나 탄핵할 수 있는 권력주체로 사고하고 대통령, 국회의원 등의 대표자들을 소환할 수 있는 주체로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촛불의 자기 권력의지의 표현들이다. 신임연계 국민투표나 심지어는 차기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심판하자는 주장들도 촛불의 권력의지를 부분적으로는 담고 있다. 촛불봉기에서 제기되는 권력에 대한 현실적 생각들은 국가권력으로 집약되는 대의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촛불의 권력의지는 대의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많은 잠재력들을 갖고 있다. 수십일 넘게 매일매일 지속되고 있는 촛불봉기 자체가 실제로는 현존하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면서 스스로 행사되는 준권력이다. 그것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해체하자는 맹아적 생각들로 나아가고 있다. 조중동은 오늘날의 부르주아 권력을 떠받치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다. 조중동을 폐간시키자는 생각은 국가기구를 해체하자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전경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를 해체하라는 주장도 생산되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총체적 해체 없이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되찾고자 하는 촛불의 취지가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직 잠재되어 있을 뿐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마. 윤리정치적 우위성, 해학, 그리고 폭력의 최소화

지금의 다중들은 적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낸다. 비대칭적 적대, 절대적 우월함 속에서 적대를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밀어붙이던 전경들에게 쉴 때에는 물과 먹을 것을 나눠준다. 시위의 전체 분위기는 축제적이며 자유스럽다. 비장함보다는 즐거움. 막히면 돌아가는 방황 행진. 이러저리 움직이며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또 새롭게 배치한다. 이것은 역량들의 새로운 배치를 생산한다.
촛불봉기의 참가자들은 분명히 자신들을 현존하는 권력들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절대적 우위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으로 느끼고 또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집회와 시위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해학과 익살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행정권력의 이명박, 경찰권력의 어청수, 언론권력의 최시중 등은 쥐들로 조롱되며 낮은 지력과 윤리적 감각을 가진 존재로 통렬하게 풍자된다. 부패와 폭압과 기만에 대한 분노는 해학과 익살로 승화되어 촛불봉기는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한 바탕의 축제처럼 발전된다. 집회대와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 중에서 많은 것들은 현장에서의 상황을 놀랄만큼 깊이 통찰하는 예리한 풍자와 비판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각각의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들이 보여주는 특이성과 능력에 놀라면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이것들의 상승작용이 수많은 사람들을 광장과 거리와 온라인 커뮤니티 앞으로 끌어 모은다. 6월 21일 청와대로 가기 위해 ‘비폭력, 비타협, 한 발 더 전진!’을 주장하며 전경차 바리케이드를 넘었던 소금사탕은 즉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틀 후 석방된 후 그가 아고라에 자신의 석방 소식을 알리면서 남긴 다음의 질문은 촛불봉기자들의 특성을 간결하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제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님들! 어쩜 그렇게 재기발랄하고 유쾌할 수 있나요? ^^ 물대포를 맞고도, 군홧발과 방패에 짓이겨 져도, 닭장차에 실려갈 때도, 폭우 속에서도... 그 낙천성의 기반은 무엇인가요? 폭넓게 발굴되고, 순식간에 공유되는 정보들, 날카로운 분석과 과학적인 전망들... 그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이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내 돈 내가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 가며 애씁니다. 목은 쉴 대로 쉬고, 땀에 흠뻑 젖어 몸은 녹초가 됩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하랴, 숙제하랴, 직장에서 일하랴, 살림하랴, 애기들 키우랴, 교육하랴, 거리 시위하랴, 전경들이랑 몸싸움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랍니다. 온갖 손해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 합니다.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 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착해 빠질 수 있나요? 폼 나게 “재협상 즉각 실시! 명박퇴진!” 구호 한 번 외치지 않고, 시위 처음부터 끝까지 봉투를 들고 거리의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줍는 님들, 모두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긁어내고 있는 님들, 실신해서 실려 갈 정도로 시위대를 보위해 주는 예비역님들, 밤새워 준비한 듯 한 김밥과 주먹밥들... 하루 이틀 새에 모여지는 수천만 원의 광고비, 병원비, 행사관련 비용들... 그렇게 순수하고 헌신적일 수 있는 그 비결이 뭔가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님들은 어디 숨어 있다가 이렇듯 갑자기 나타났습니까?

만약 이 힘들에 어떤 원천이 있다면 서로가 배우면서 차이들을 합류시키고 공통되어 나가는 혁명적 협력의 구성과정일 것이다. 공통되는 힘들, 제헌의 힘들은 이미 제정된 것들의 경직성을 넘어 측정될 수 없고 불가해한 능력으로 그 절대적 우위성을 보여준다. 이 촛불의 제헌권력은 낙천성의 원천이며 새로운 과학의 원천이고 새로운 윤리를 정초하는 바탕이며 새로운 삶을 열어내는 신성한 힘이다.
촛불봉기에서 일반화된 구호인 비폭력은 이 신성하고 절대적으로 우위인 힘의 절대적 폭력을 표현했던 한 방식이었던 것인가? 권력의 폭력진압 앞에서 그것은 서서히 저항적 비폭력으로, 방어폭력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절대적 폭력의 비폭력 형태나 저항적 비폭력 형태 혹은 방어폭력의 형태는 권력이 항시적으로 사용하는 선제폭력(현존하는 부르주아적 권력체제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실존하는 선제폭력의 형태이다)과 결코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대칭적이고 대항적인 폭력의 구사가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부분적 부정일 뿐이라면 비폭력이나 저항적 비폭력, 그리고 그것의 높은 수준인 방어폭력은 다중의 공통된 힘이 갖는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면서 상황에 따라 표출되는 현상형태이다. 절대적 폭력은, 결코 행사됨이 없는 상태에서 국지적 폭력을 억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 우위의 폭력, 신성하고 자연적인 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떠한 저항이나 방어도 없는 굴복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폭력들이 결국 이 절대적 폭력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엄중한 선언이 아닐까? 절대적 폭력은 모든 시민상태들을 근본에서 규정하는 자연상태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선제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비폭력, 저항적 비폭력, 방어폭력 등으로 현현하면서 자신을 생명의 존엄과 삶의 (비록 잠재적일지라도) 절대적 공동체로, 생명들 사이의 혁명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 폭력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촛불은 총과 다르다. 그것은 국가정치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삶정치의 무기이자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여 발생한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협력, 공통되기이며 인류 공동체의 실재성을 알리는 상징이 아닌가?

바. 새로운 민주주의

촛불봉기는 직접민주주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일반화된 해석이다. 확실히 봉기자들은 일체의 대의자들을 불신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정치적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과 핸드폰은 직접민주주의에 광대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된다. 하지만 이 절대적 폭력으로서의 제헌권력에게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사이의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대의는 직접적인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촛불운동의 목표가 아니라 절대적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구축하며 그에 걸맞는 정치적 제헌양식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론은 반혁명적이다. 반면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로의 복귀 주장은 낮동안의 노동에 이은 밤시간의 야간집회를 항구화해야 하는 떠안기 어려운 부담을 준다. 직접인가 대의인가가 쟁점이 아니라 다중의 절대적 구성역능과 제헌권력의 압도적 우위를 승인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에 걸맞는 제헌의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운영자로 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지금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발명되어 나와야 할 절대민주주의적 과제이다.

............


글이 길어 한번에 안 들어가네요^^(첨부파일로 올립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다중, 자율주의, 자율평론, 조정환, 진보, 촛불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20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사회를 이끄는 이는 반대와 혼란을 용납할줄 알아야 한다
철학 한 토막 | 2008년 07월 03일 11시 00분
사회를 이끄는 이, 더군다나 그가 교인이라면 반대와 혼란을 용납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는 자신을 신과 맞서는 교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 세계의 창조는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다. 인간의 가치는 설득에 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선악의 선택지를 보여줌으로써 선탁할 수도 선택될 수도 있다. 문명이란 보다 고상한 선택지를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에 내재하는 설득력에 의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힘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리 불가피한 것일이자도 일반 사회에서나 살아남은 개인에게나 문명의 파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활기찬 문명에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며 관념에 대한 감수성은 호기심이나 모험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적인 질서는 스스로의 공적에 의해 살아남으며, 자신의 미완성을 인지하는 능력에 의해 변형된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중에서)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트랙백0 | 댓글0
교섭, 권력, 문명, 설득, 철학, 화이트헤드
트랙백주소 : http://dinu.hosting.paran.com/trackback/19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1]

블로그를 열면서(7)
블로그를 이전합니다.
클라라 하스킬의 특별한..(1)
음악의 신성함에 대하여(1)
음악에세이 -테초에 소리..
음악에세이 -태초에 소리..
용기에 대하여(아리스토..(2)
괴테, 들장미, 그리고 슈..
굴드 음반의 복제, 그리..
음악의발생학 -태초에 소..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1)..
글렌 굴드 vs 컴퓨터(5)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음악, 그 존재론적 모순..(2)
음악, 그 존재론적 모순(1)
코지판투테를 보는 어린이
음악에세이 1 -음악과 음..(1)
얄미운 천재 미하일 플레..(2)
사르트르 "실존주의란 무..
하스킬/그뤼미오의 라이..(1)
0

fdfdfdfdf
10월 13일 - wdsf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
10월 13일 -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
2008년 -
네. 몇몇 연주를 더 올려..
2008년 - 디누리빠띠
문제라뇨.. 얼마든지 스..
2008년 - 디누리빠띠
클라라 하스킬에 대해서..
2008년 - 로사
고통중에 검색을 하다가..
2008년 - 나그네
역시나 한치의 오차도 없..
2008년 - pastcloud
결정적으로 굴드의 흥얼..
2008년 - Sid S. Jeong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무..
2008년 - 주인장
용기란 두려움과 태연함..
2008년 - 김태경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네..
2008년 - 저녁놀
의도야 뭐 보나마나, 요..
2008년 - 디누리파티
맞습니다. 말씀처럼, 정..
2008년 - BACH2138
기가 막힌것은 본문에도..
2008년 - 디누리파티
굴드 팔아먹는 상술의 연..
2008년 - BACH2138
올려주시는 음악 잘 듣고..
2008년 - 발가락
모순일수 밖에요. 아무리..
2008년 - 디누리빠띠
플라톤과 피타고사스 대..
2008년 - 둥근사각형
좋은 글이군요.... 클래..
2008년 - BACH2138

좋아하는 음악가들이 언..
김너굴네 집
Shine A Light, 구르는..
소년의 눈, 소녀의 귀

교육운동 네트워크
교육을 바꾸자, 학교를 바꾸자
아름다운 교육



믹시